베품에는 세 종류가 있다. 아까와하며 베푸는 것. 의무적으로 베푸는 것. 감사함으로 베푸는 것이다. > 가문정보 > 씨족 문중 가문

조선 시대 후기 노론을 대표하는, 특히 세도정치 당시 세도 가문 중 하나였던 명문가.

사실상 조선 후기 세도 가문 다음으로 정국을 좌지우지한 가문이다.

조선조에 정치가로서 최고 영예인 왕통(王統)을 상징하는 종묘배향공신을 2명[21] 배출했다. 이 밖에 기로소에 들어간 인원이 21명[22], 관력으로는 9명[23]의 정승, 정1품은 24명, 7명[24]의 대제학과 청백리 7명[25], 부원군 6명[26], 공신 11명[27], 판서 55명[29][32], 봉군 33명[34][35], 시호 53명[37][38][39], 호당 10명[40], 장신 4명, 암행어사 17명 등 문과 급제자 총 256명[41]을 배출하고 무과 급제자는 86명을 배출하는 기염을 토했으며 왕실과 인척이 아니면서도 조선 시대를 통틀어 늘 권력의 중심에 있었지만, 청백리 7명을 배출하는 등 권세를 부리거나 남용하지 않은 깨끗함으로도 명망이 높았다. 또 무엇보다 조선 후기의 청요직인 규장각 직각을 14명을 배출하고[45], 비변사 당상관 17명을 배출하는 등[46] 세도정치 때조차 중앙에서 버텨냈다는 것을 알 수 있다.[47] 문과 급제자 출신 순위로도 전체 7위로 이씨로는 840명의 전주 이씨 다음이다.

연성부원군 이석형은 세종 때 장원급제해 성종 때까지 무려 6대를 섬겼고, 세조의 총애를 받은 훈구파로서 정인지와 함께 고려사 및 치평요람을 편찬한 대학자였다. 현손인 월사 이정구가 좌의정을, 6세손 이귀가 1등 정사공신 작위를 받았다.

월사 이정구는 신흠, 장유, 이식과 함께 조선 중기 4대 문장가로 이들과 함께 한문사대가, 사대문장가 또는 이들의 호를 앞자리를 따서 월상계택(月象谿澤)이라고도 일컬어지기도 한다. 또한 월정 윤근수의 문인으로 선조 때 대제학을 거쳐 인조 때 좌의정이었다. 아들 백주 이명한도 인조 때 이조판서와 대제학을 지내고, 맏아들 청호 이일상이 효종 때 대제학에 올라 조선 첫 3대 연속 문형(文衡)을 배출했다. 막내아들인 이단상도 문명으로 이름이 높았으며 부제학을 역임했고, 김창협, 김창흡 형제의 스승이다.

1761년 평양 원유사건으로 사도세자가 탄핵을 당하게 되자 사도세자를 지키려던 영의정 진암 이천보, 우의정 민백상, 좌의정 이후가 1달 간격으로 음독 자결했다. 이천보, 이후 모두 연리로, 정조 입장에선 연안 이씨에 빚을 진 셈이었다. 후일 노론이 다시 여당이 됐을 때 연안 이씨는 빛을 발했다. 홍재전서 일득록 편에 따르면 연안 이씨를 삼한갑족이라고 칭했으며, 정조가 항상 월사의 문집을 베개 옆에 놓고 봤다고 전해진다.

6대 문과 급제 집안이 4집[49], 4대 문과 급제 집안이 2집, 4대 무과 급제 집안이 1집, 3대 문과 급제 집안이 12집, 4형제 문과 급제 집안이 1집, 3형제 문과 급제 집안이 3집 등이 있다. 또한 5대 판서 역임 집안이 1집, 3대 판서 역임 집안이 5집, 부자 판서 역임 집안이 6집, 형제 판서 역임 집안이 8집이다. 그리고 월사가문은 호당에 든 사람이 5명인데 이 호당 기록은 3대 대제학 가문 중에 제일 많이 배출하였다. 또한 기로소는 70세 이상에 종2품 이상인 문과 관료만 들어갈 수 있어 입소 조건이 까다로워 역대 700명 정도밖에 없는데 기로소에 입사한 인물이 21명으로 전체 씨족 중에서 2번째로 많이 배출하였다.

연안 이씨 소속 인물들이 존경받는 이유는 많은 고관대작의 수에만 있지 않다. 연안 이씨는 구한말과 일제강점기 때 수많은 독립운동가를 배출했다. 더욱이 임진왜란, 병자호란 등 양란과 정묘호란 가릴 것 없이 외교관, 혹은 사신으로서 원군을 불러오거나 기타 자국의 유리한 결정을 하는데 역할을 수행했던 인물들이 포진했다. 재밌는 점은 조상의 영향을 받았는지 집현전 학사 이석형의 후손들이라 굵직한 국문학자들이 후손 중에 눈에 띈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