부인도 함께 참석해 시제를 지내는 문중, 대부분 문중이 여자는 단순히 음식을 장만하고 시제 당일 음식상을 놓기 위해 참석하지만 이광수씨(60 읍 남동)가 이끄는 연안이씨 소문중은 여자들도 당당히 주체로서 참여한다. 광수씨는 3년전 반대하는 문중 어르신들도 있었지만 제족수도 적은데다 일가끼리 서로 알고 지내면 좋을 것 같아 시작했다고 하는데 의외로 반응이 너무 좋다고 한다. 부부가 함께 참석해 문중 내력도 알고 업적을 남긴 선조들에 대해서도 서로가 알게 되니 자녀들의 교육에도 보탬이 되고 있다고 한다. 따라서 시제 당일 날은 24인승 차가 각 마을을 돌며 사람들을 실어 시제 장소인 읍 장활리로 향한다. 부부와 같이 오순도순 지내는 시제, 부인들이 참여하니 분위기도 한결 부드러워지고 이야기꽃도 그칠줄 모른다고. 시제 날이 되면 이광수씨가 잃지 않고 준비하는 것이 있다. 제족들에게 가르쳐줄 문중 내력이다. 우리문중이 어떻게 해남에 내려왔고 누구는 누구의 손이고 선조들 중에는 누가 있다라는 교육내용이다. 이렇듯 광수씨가 고집스럽게 문중 역사를 제족들에게 가르치려고 하는 것은 문중의 뿌리를 알아야 문중에 대한 긍지도 자신들에 대한 자부심도 생기기 때문이란다. 연안이씨 청련공파는 청련공 이후백으로부터 시작된다.
조선시대 이조판서와 형조, 호조판서를 지낸바 있는 후백은 청백리로 유명했던 사람이다. 그가 죽은 후 장사 지낼 돈도 없어 임금이 장례비용을 보내 치렀을 정도였다는 것. 청련공으로부터 하나의 파를 형성한 청련공파는 청련의 정신을 후손들이 계속 이어 충과 효, 의리, 청렴을 주된 덕목으로 삼은 가문을 만들어 냈다고 한다. 청련공의 아들인 선경은 임진왜란에 출전해 순절한 인물이다. 그러자 그의 아들 다섯 중 태길, 유길, 익길, 정길이 아버지의 원수를 갚는다며 붓 대신 칼을 선택, 무과에 급제해 장수의 길을 택했다고 한다. 선경의 아들 다섯은 모두 김장생의 문하생들이었는데 셋째아들 복길만이 문인의 길을 계속 걸었고 4명은 무인의 길을 걸었던 것이다. 이중 유길과 복길이 해남과 인연을 맺게 된다. 유길은 현재 삼산면 충리에 유허비각이 세워져 있는데 유길과의 인연으로 충리라는 마을이름도 얻게 되었다고 한다. 복길은 이후 성장해 백진남의 사위가 되고 삼산면 송정리에서 기거하게 된다. 복길은 7곱명의 아들을 두었는데 넷째 아들 의순의 손이 바로 광수씨이다. 광수씨는 의순의 손들과 복길의 다섯째 아들인 의직의 손들을 합해서 만들어진 사문중 문임을 맡고 있다. 복길은 병자호란이 일어나자 군량미를 조달하는 등의 역할을 담당했다고 한다. 또 유길은 정유재란 때 이순신을 도와 명량해전에 참가했고 이 사실을 알게 된 선조가 충효라는 친필을 내리고 어전무과를 보게 했다는 이야기가 전한다. 이후 유길은 명나라와 청나라와의 전쟁이 일어났을 때 명나라의 청을 받아 파병을 나가게 되는데 이때 그는 중국 땅에서 청나라와 맞서 싸우다가 사망하게 된다. 이로 인해 그는 영의정에 추증되고 그가 살았던 삼산면 충리에는 그의 유허비각이 세워진다. 연안이씨 시조는 이무이다. 당나라 사람으로 백제 정벌때 중낭장의 벼슬로 참전했던 사람으로 전쟁이 끝난 후 신라에 남기를 원해 신라에서 그를 연안백에 봉하고 황해도 연안을 식읍으로 하사했다고 한다. 이로부터 연안이씨라는 본관이 탄생된 것이다. <사진-삼산면 충리 이유길 유허비각:삼산면 충리는 이유길과의 인연으로 충리라는 마을 이름을 얻게 됐다.>
<박영자 기자> [2001년 06월 22일]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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