베품에는 세 종류가 있다. 아까와하며 베푸는 것. 의무적으로 베푸는 것. 감사함으로 베푸는 것이다. > 연안이씨 뿌리 > 연안이씨 시조

조(始祖)께서는 중국(中國) 5호16국(五胡十六國)시대 서량(西凉)을 세운 무소왕(武昭王:리호李暠)의 후손(後孫)으로서 서기(西紀) 660년 당(唐) 고종(高宗) 현경顯慶) 5년 소정방(蘇定方)장군과 함께 신라원군(新羅援軍)의 장수로 참전(參戰) 하시어 백제(百濟)와 고구려(高句麗)를 정복(征服) 하는데 공(功)을 세워 중랑장(中郞將)에 오르고 나당화합(羅唐和合)과 신라가 삼국통일을 이룩하는데 크게 기여하신 분이다.
백제를 정복한후 소정방(蘇定方)장군이 백제전(百濟戰)의 승세(勝勢)를 몰아 신라까지 정벌할 욕심으로 여러 장수들과 논의 하였는데 시조(始祖)께서 말씀하시기를 신라 군사가 막강하고 고구려가 건재하고 있는 이 시점에서 신라와의 연합이 당의 국익(國益)이라는 올바른 판단으로 소정방(蘇定方)장군을 설득하여 먼저 당라(唐羅)간에 무술시합(武術試合)을 해본 연후에 결정 하는것이 옳겠다고 건의하여 망해정(望海亭)에서 궁술(弓術)을 시합하여 신라에서 이기니 소정방(蘇定方)장군이 탄복하면서 리무(李茂)장군의 건의가 없었다면 대사(大事)를 크게 낭패할뻔 하였다 하고 계획을 변경했다.
시조(始祖)께서 나당군(羅唐軍)의 위험한 대치 상황을 무술시합으로 유도(誘導)하는 기지(機智)를 발휘하여 나당간의 화합을 굳히는 계기로 만들었으며 신라인들 한테는 크나큰 은인(恩人)으로 생각하게 되었다.
유인원(劉仁願)장군과 함께 백제땅에 머물러 지키다가 서기 668년 나당연합군(羅唐聯合軍)은 고구려까지 정복하고 시조(始祖)께서는 당(唐)이 고구려 땅에 설치한 9 도호부(都護府)의 하나인 시염성(시鹽城:現 黃海道 延安)을 유수(留守) 하셨다.
그뒤 우리 시조(始祖)의 나당화합과 신라가 삼국통일을 이룩하는데 기여한 공(功)으로 김유신(金庾信)장군의 주청(奏請)에 의하여 문무왕(文武王)께서는 시염성을 식읍(食邑)으로 주고 높은 벼슬을 제의했으나 극구 사양하므로 국빈(國賓)으로 예우(禮遇) 하셨다 한다.
그 때 당나라에서는 측천무후(則天武后)가 섭정 국정(國政)을 어지럽히던 때이므로 시조(始祖)께서는 본국(本國)인 당(唐)나라로 귀국하지 않으시고 신라에 머물러 오늘날 연안리씨(延安李氏)의 시조(始祖)가 되시었다.
경북 군위군 효령면 장군리에 삼장군(三將軍) 사당(祠堂)이 있어 신라(新羅)에서 삼국통일(三國統一)을 이룩하는데 큰공을 세우신 김유신(金庾信)장군 소정방(蘇定方)장군 리무(李茂)장군을 봉안(奉安)하고 매년단오절(端五節)에 관청에서 제수(祭需)를 준비하고 백성들과 함께 제향(祭享)을 올리고 깃발을 들고 풍악을 울리며 축제일로 삼아 조선시대(朝鮮時代) 말엽까지 이어져 내려왔다 한다.
지금은 군위군(軍威郡)과 김해김씨(金海金氏) 연안리씨(延安李氏) 후손(後孫)들이 해마다 단오절(端五節)에 제향(祭享)을 올리고 있다.
시조(始祖)이후 약 500 여년간 나라가 바뀌고 수많은전쟁과 재해등으로 문헌이 실전(失傳)되어 여러대(代)의 선계(先系)를 잃게 되었고 각파(各派)간에 세대(世代)구분이 불분명(不分明)하게 되었다.
여러 파(派)로 분파(分派) 되었다 하나 현재는 판사공파(判事公派) 첨사공파(詹事公派) 대장군공파(大將軍公派) 부사공파(副使公派)등 4파만 전해내려 오고있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