베품에는 세 종류가 있다. 아까와하며 베푸는 것. 의무적으로 베푸는 것. 감사함으로 베푸는 것이다. > 연안이씨 뿌리 > 연안이씨의 위상

판사공파 석균일가님 작성

   

이글은 연안리씨(延安李氏)라고 쓴 글의 보충 설명이다

1. 리씨의 유래에서
고요(皐陶)가 소호(少昊)의 후예라고 쓴것은?
ㅡ소호(少昊)의 후예라고 적혀 있고 어느책에는 전욱의 증손이라고 쓰여 있는데 소호는 전욱의 숙부라고 합니다 중국의 신화책에 소호는 동쪽나라의 황제였다고 함 (삼황오제중의 한분으로 나오는 기록도 있슴)
소호의 후손하고 전욱의 손녀 여화(女華)가 결혼하여 낳은 아들이 고요가 아닌가 합니다 고요는 산동성 곡부현에서 탄생하고 묘지는 안휘성 수현에 있다고 전해짐
고요의 장남은 백익(伯益:영씨의 시조) 李씨는 차남 은성(恩成)쪽이라 함

2. 리씨가 이동한 경로
그후 이정(利貞)의 11대 손(孫) 노자(老子)가 하남성 고현에서 탄생 주나라 수장사가 되었고 주나라의 쇠함을 예견하고 청우(靑牛)를 타고 서쪽으로가는 도중 영보현 함곡관에서 관문을 지키는 관리 윤희(尹喜)의 청을 받아 들여 도덕경 5000자를 가르쳐 주고 섬서성 주질현(周至縣)에서 돌아 가셨다 한다 그의 일부 자손들은 그자리에 남아 훗날 하북성 조군(趙郡)에 많이 살게 되었고 노자를 따라간 자손들은 섬서성의 이웃인 감숙성 농서에 자리 잡게 되었다
그후 후손들이 농서의 호족(豪族)이 되었고 한(漢)무제(武帝)때 유명한 장군 리광(李廣)이 흉노와 싸워 큰 공을 세우기도 했다 그뒤 5호 16국 시대 후손 리호(李暠)가 서량(西凉400-421)이라는 나라를 세워 무소왕(武昭王)으로 등극하고 돈황 에다 도읍을 정하고 그뒤 주천 그리고 다시 돈황으로 3대 22년간을 통치하다 멸망했다
그후 북방 민족들과도 어울려 지내고 통혼을 하여 세력을 키워온 그 지방 호족( 豪族) 리연(李淵)이 당나라를 세우게 되었다 당나라에서 공이 큰 장수들한테 황실 성인 리씨(李氏)를 사성하고 모든 리씨(李氏)를 농서리씨로 통일 시켰다
당(唐) 고조(高祖) 리연(李淵)의 7대조가 무소왕이고 무소왕의 아들 흠(歆:서량의 2대왕)이 6대조이고 우리는 무소왕의 또 다른 아들 번(飜)의 후예라 하여 당나라 황실과 종실간이라 칭한다

3. 시조에 대하여
구전으로만 내려오다가 저헌공(石亨:세종때 집현전 학사 판중추부사 연성부원군) 문집(성종의 명에 의하여 문집 발간 사위 송여해 주관 1587년 선조때 증손 계 증보)에 당 중랑장으로 기록되고 관향에 대한 이야기도 나옴(황해도 연안 취원루에서 관향에 대한 회고 평북 영변이나 중국의 연안이 아님)
또 세종때 시인 허추의 기록에 삼장군당(소정방 김유신 리무 장군을 모신 사당) 이야기가 나오는것을 1530년 중종때 발간한 신증 동국여지승람 경상도 효령현편에 김유신사로 기록됨
지방마다 삼장군당처럼 따로 받드는 수호신들의 사당이 있었슴(대부분은 산신당)
허추의 기록에 관(官)에서 제사를 주관하였다고 나오는것을 보면 사당이 있는 곳이 효령현의 관아가 있던 소재지 이기 때문에 효령현에서 제사를 주관하게 되지 안했나 추측함
그리고 신라 고려 어느때부터인지 몰라도 조선 개국 이전부터 제사를 지내온것 같다
김유신사(金庾信祠)라고 되어 있지만 내용중에 옛 장수는 서성(西城:시염성)의 주인이었다는 이야기는 우리 시조를 가리킴
각간선생 실기(삼국지연의처럼 이야기 책 형식을 빌어 그의 후손이 쓴 김유신 장군 전기)에 간략히 적혀 있다
헌종연대(1842년)에 책으로 엮은것임(사료적 가치는 적음)
일부 파보에 당시 장군들은 나이 잡수신 노장들이라 적어 놓고 시조께서 아들 5형제를 두었다고 적은 기록도 앞뒤가 맞지 않는다

4. 시조의 공적
당나라에서 신라까지 치려 의논할때 시조께서 신라 군사도 막강한것을 알고 잘못하다간 백제 평정한 공도 무위로 돌아갈까 걱정이 되어 신중론을 펴 무술시합으로 유도 상대방의 전력을 알아보기 위함이었다
그 덕분에 군사가 당나라 보다 많지 않은 신라도 고마움을 느낀것이지 당나라 장수가 본국인 당나라보다 신라를 위해서 일했다고 기술하는것은 시조할아버님 한테 누를 끼치는 일이다
또 무열왕이 시염성을 식읍으로 주었다는것도 말도 안되는 소리다
무열왕 생존(661년 사망)당시 시염성은 고구려 땅이고 자기네 나라 땅도 아닌데 어떻게 식읍으로 준단 말인가
그리고 당시 당나라 명령을 받는 처지에 있는 무열왕이 당나라 장수한테 식읍을 준다는 이야기도 사리에 맞지 않는다
신라에서 삼국통일를 한후에 회유책으로 문무왕께서 시조께서 유수하셨던 시염성을 식읍으로 준것이고 당나라에서는 측천무후가 정사에 관여 혼미하므로 시조께서는 신라에 머무르시지 않으셨나 생각한다.

5. 시조 지석에 대하여
삼국시대에는 고구려 안시성주 양만춘(楊萬春)처럼 그 지방을 관장하는 성주(城主)가 있었다 우리 시조도 당나라가 안동도호부를 설치할때 시염성을 관장하는 성주가 되셨다 후에 문무왕이 그 성을 식읍으로 준것이다
연안백(延安伯)의 지석은 조선시대 위선심(爲先心)이 강한 후손이 만든것 같다 (40 여년전에 병연(秉延:조선환여지승람 저자)씨가 부여에다 시조 단소인 금성단을 설치 한것처럼) 그러나 월계공(月溪公:李文愚)이 발굴하신 공로는 인정하나 조선시대에 만들었다 해도 글자체로 보아 시조의 지석이라고 단언할수 없다 당시에도 종중에서 의심을 했고 현재 연대 박물관에 소장되어 있으니 각자 확인하기 바람(글자가 확실하지 않음)

6. 관향에 대하여
고려사의 대장군공 송(松)의 아들인 리분희 난에 분명하게 염주인(鹽州人)으로 기록 되어 있슴 그후 충선왕때 (1310년)연안으로 개칭되어 연안리씨가 됨
청음(淸陰) 김상헌(金尙憲)이 쓴 월사공(月沙公:李廷龜) 신도비에도 염성에서 연안으로 개칭되어 연안리씨가 되었다고 적혀 있슴
신라시대 연안백이라는 작위를 받아 연안리씨가 되었다는 설이 있으나 백(伯)이란 식읍을 받은 분한테 그곳 지명에다 붙여 부르는 경칭(敬稱)일 뿐이다(道伯처럼) 그리고 그당시 성(城:당시는 큰 고을을 가리킴)을 관장하는 분을 성주(城主)라 불렀다
현재 연안이라는 명칭은 고구려 시대에는
동음홀 또는 시염성(시鹽城)  통일신라 후기에는 해고(海皐)  고려시대에는 염주(鹽州)였다
조선시대에 와서
공(公) 경(卿) 대부 (大夫) 한테는 공(公) 현령이나 현감등 지방 수령한테는 후(侯)등을 썼으나 그 후에 공(公)으로 일반화 되었다(지금도 충북 청원군 문의 문화 관광단지에 가면 문의 현령들의 姓뒤에 侯자를 쓴 영세 불망비가 수십기 가 있다)
중국에서는 제후국이 있어 제후의 뜻으로 왕(王)이나 후(侯)를 붙인적이 있으나 우리나라는 제후국이란 속국을 둔적이 없고 고려 현종때에 와서 설총한테 홍유후(弘儒侯) 최치원한테 문창후(文昌侯)로 추존한것이 최초이다
서양식 공(公) 후(侯) 백伯) 자(子) 남(男)의 귀족 작위는 한일 합방후 일본인들이 우리나라 사람들한테 처음으로 적용한것이다
또 연안이라는 지명을 짓는데 우리 시조하고 연관이 있는것처럼 이야기 하나 그 전에 분희공 때문에 석주(碩州)로 개칭된적은 있지만 그 당시 (충선왕 2년 서기 1310년) 후손중에 힘을 쓸만한 유력 인사도 없었고 원나라(몽고족이 세운 나라) 지배를 받던 고려가 당나라 장수 벼슬 이름을 따 연안으로 개칭할리가 없다
관향의 신라때 명칭도 동국여지승람에 시염성으로 기재되어 있슴 글자가 비슷하여 고염성으로 오기되어 각종 자료에 기록된 경우가 많음

7. 각파의 순서에 대하여
현종때 사람 정시술이 쓴 제성보(諸姓譜)에는 첨사공파가 제일 윗쪽에 있고 부여 교육감을 지낸 만승(萬承)씨가 편찬한 추원보( 판사공파 중 전서공파 족보 1959년 간행)에 첨사공파를 큰집으로 해 놓았다 그런데 그 족보에는 고구려를 정복할 당시 당군을 지휘한 리근행(李謹行)을 시조의 아들로 말갈족 추장 다조세를 손자로 올려 놓았다 또 고려 의종때 사람인 판사공파 파조인 현려(賢呂)를 몇대나 뒤인 고종때 사람인 첨사공파의 파조인 습홍(襲洪)의 조카뻘로 등재해 놓았는데 어찌 그것이 맞다 할수 있는가? 또 그 족보대로 한다면 판사공파중의 큰집은 부사공파가 된다 나는 어느파가 큰집이냐 하는것은 기록이 정확하지 않아 주장할수 없다 내가 쓴 순서는 연대별로 쓴것 뿐이다
판사공(고려 의종조) 첨사공(고려 고종조) 대장군공(고려 고종조) 부사공(고려 공민왕조)

8. 청백리에 대하여
청백리록은 순조 초기 발행한것으로 우리 연리는 6분이 기재되어 있고 그후에 받은 분이 1분 나오는데 순조이후의 기록은 찾기가 힘들다(한번 본적이 있는데 그때는 관심이 없어서 출처를 확인하지 않았다)
순조대왕 이후 녹선된 기록에 명식(命植)이란 분을 본적이 있다
명준(明俊)은 연안리씨 각파 족보에 등재되지 않은 인물이다(誤記일 뿐이다)

9. 리씨로 표기한 이유
1947년에 와서 조선어 맟춤법 통일안을 재 수정할때 남한에서는 두음법칙을 신설하여 두음에 나오는 ㄹ은 ㅇ이나(라-이)ㄴ으로(로-노) 바뀐다고 정하였다 그리하여 두음법칙이 없는 북한은 그냥 리로 쓰고 남한에서는 이로 쓰게 되었다
그리고 수천년 동안 이어져 온 성씨까지 두음법칙에 적용하는것은 잘못이라고 본다 더군다나 요즘은 외래어 때문인지 ㄹ발음은 많이 쓰는 편인데 발음할수 있는것을 억지로 사장시키는것으로 본다 또 남북한이 통일하여 쓰는것도 아니고 1947년 이전의 사람들은 다 리로 썼고 더군다나 우리 연안리씨는
중국계 리씨 이므로 중국에서 표기하는대로 한자표기는 李 로마자 표기는 Li  그리고 한글표기는 리로 쓰는것이 맞다고 본다(오랫동안 써온 성(姓)의 표기는 바꾸지 말아야 한다)

10. 소부감의 한문 표기에 대하여
고려 초기 물장성(物藏省) 광종때 보천성(寶泉省) 또 소부감(少府監)으로 고침 소부감(小府監)으로도 쓰고 내부감(內府監) 또 소부시(小府寺)로도 썼다
원래 당나라 관제를 따라 한것이고 당나라에서는 소부감(少府監)으로 썼다
고려에서는 혼용해서 썼지만 판사공이 재직 하셨을 당시 표기로 써야 맞을것 이다 조상님들은 비문(碑文)등에 少府監으로 썼다
현대식으로 말한다면 소부감(少府監)의 長인 判事이지만 옛날에는 판소부감사(判少府監事)로 썼다.

수정 부분 - 이 글자 색깔로 표시

Last Update 2004. 10. 19.